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(문단 편집) == 이교도와 외국인에 대한 태도 == 리처드는 애초에 이슬람 교도에 대해 증오심을 갖던 인물은 아니었다. 심지어 리처드는 여동생인 조안나[* 시칠리아의 군주인 굴리엘모 2세와 결혼했으나 굴리엘모 2세가 1189년에 사망했고 왕위는 그의 사촌인 탄크레디가 계승했다. 그런데 탄크레디는 굴리엘모 2세가 조안에게 [[지참금]]으로 준 토지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고 포로로 잡아두자, 이에 빡친 리처드는 3차 십자군을 나서는 길에 먼저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상륙해 탄크레디부터 박살내고 여동생의 상속분을 돌려주었다.]을 화평 사절로 온 살라딘의 동생인 [[알 아딜]][* 살라딘 사후에 술탄이 된다.]과 결혼시켜 예루살렘의 공동 통치자로 삼으려고 했다. 이렇게 되면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분쟁이 사라지리라고 여겼던 것이다. 허나 이 계획은 당연하게도 가톨릭 성직자들의 반대와 더불어 "날 이슬람 교도에게 시집 보낼 생각이냐?"라고 열받은 조안나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자 리처드는 알 아딜에게 상황이 이러니 당신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. 당연히 살라딘의 동생도 개종할 리는 없으니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. 이런 점으로 볼 때 종교적 신념을 그리 중시하지는 않은 듯 하다. 또한 리처드는 평화 협상에 따라온 알 아딜의 아들인 [[알 카밀]][* 알 아딜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으며 비교적 기독교도에 호의적인 인물이었다. 나중에 6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 협정을 맺는다.]을 기사로 임명하기도 했다.[*출처 War and chivalry the conduct and perception of war in england and normandy p26 저자 Matthew Strickland 출판 :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국][* 이에 대한 1차 사료는 1200년경에 라틴어로 쓰여진 Itinerarium Regis Ricardi(리처드 왕의 여행기)이다. 이 책에 의하면 리처드는 아버지인 알 아딜을 따라 리처드를 방문한 11살의 알 카밀에게 기사 작위와 함께 작위 수여에 쓰인 기사 검을 선물로 주었고, 알 카밀은 무척 기뻐했다고 나온다. 이 기록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라면 또 다른 사료로 6차 십자군 당시 [[프리드리히 2세]]와 알 카밀간의 회담을 다룬 공식 문서상에 '기사 작위를 받은 사라센의 왕 알 카밀'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, 정황상 살라딘의 조카이자 이집트 대영주인 알 아딜의 아들인 알 카밀에게 작위를 줄 만한 인물은 리처드 1세밖에 없었을 것이다.] 여동생을 이슬람 교도에 시집보내려던 계획이나, 적의 조카를 기사로 임명하는 등 이러한 행동들은 리처드가 이슬람 교도에 대해 맹목적인 증오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